유럽 각국 정부가 국방비 지출을 사상 최고 수준으로 늘리고 있지만, 이 막대한 자금이 역내 국방 기술(Defence Tech) 혁신 생태계 구축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분쟁 등 지정학적 불안정 심화로 유럽의 국방 기술 투자액은 2024년 12억 유로에서 2025년 25억 유로로 두 배 이상 증가했지만, 전문가들은 현재의 재정 규칙과 조달 시스템으로는 이러한 투자가 장기적인 자립 역량 강화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분석합니다.
런던 비즈니스 스쿨의 경제학 교수 파올로 수리코(Paolo Surico)는 성공적인 혁신 생태계 조성을 위해 정부의 공공 이익 분야 자금 지원, 연구 기관의 지식 최전선 확장, 민간 부문의 지식 제품화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현재 유럽 국방 예산의 약 80%는 주로 미국에서 장비를 조달하는 데 쓰이고, 국내 R&D 투자는 20%에 불과합니다. 이는 미국이 R&D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기존 대형 방산업체 중심의 조달 방식은 혁신보다는 기존 기술 개선에 집중되어 신기술 도입이 느리다는 문제도 제기됩니다.
수리코 교수는 국방비 지출을 국내 R&D와 혁신에 집중해야 장기적인 생산성 향상과 경제 성장을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유럽연합(EU)이 국방 예산을 국가 재정 적자 한도에서 제외한 현행 재정 규칙이 오히려 미국산 장비 구매를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비판하며, 국내 국방 스타트업의 R&D 투자에 한해서만 적자 한도를 면제하는 '표적 혁신 면제'를 제안했습니다. 만약 재정 규칙 변경이 어렵다면, 연기금 등 민간 부문 자금을 국방 기술 혁신에 유치하는 방안도 대안으로 제시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전쟁 수행 능력 향상을 넘어, 유럽 전반의 기술 경쟁력을 높이고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국방 기술은 인공지능(AI), 로봇 공학, 사이버 보안 등 첨단 기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이 분야의 혁신은 민간 부문으로 파급되어 전반적인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유럽이 국방 기술 자립을 통해 지정학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