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년간 'X의 우버'나 버티컬 SaaS 같은 소프트웨어 중심의 스타트업 피치가 주를 이뤘던 벤처캐피탈(VC) 업계의 풍경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자본 집약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받던 하드 사이언스, 즉 딥테크(Deep Tech) 분야가 투자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는 피터 틸(Peter Thiel)이 “날아다니는 자동차를 원했는데 140자를 얻었다”고 비판했던 과거와 달리,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AI가 기여하며 새로운 기술 혁신의 시대를 열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세 가지 주요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AI가 하드 사이언스의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딥러닝(Deep Learning) 기술, 특히 알렉스넷(AlexNet)과 트랜스포머(Transformer) 아키텍처의 등장은 AI가 스케일(Scale) 문제임을 입증했고, GPT-3는 이러한 스케일링 법칙을 검증하며 AI를 불확실한 과학에서 자본 배분 문제로 전환시켰습니다. 알파폴드(AlphaFold)가 단백질 구조 예측 기간을 수개월에서 수초로 단축하고, 인실리코(Insilico)가 AI로 신약 개발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인 사례처럼, AI는 탐색, 시뮬레이션, 설계 비용을 붕괴시켜 원자(atoms) 기반 산업에도 소프트웨어와 같은 빠른 성장 경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둘째, 창업가들이 딥테크를 '높은 지위(high status)'로 만들었습니다. 일론 머스크(Elon Musk)의 스페이스X(SpaceX),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의 딥마인드(DeepMind),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Doudna)의 CRISPR 등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여 큰 상업적 성과를 달성한 선구자들이 등장하면서, 업계 전반에 '아하(Aha)' 모멘트가 발생했습니다. 이제 최고 인재들은 광고 클릭 같은 단기적 성과보다는 인류에게 중요한 문제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며, 이는 딥테크 분야로의 인재 유입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셋째, 지정학적 변화가 자금을 딥테크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과거 리카도(Ricardo)의 비교우위론에 기반한 글로벌 분업이 효율성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통제와 자립을 우선하는 산업 전략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방위 산업에서 핵심 부품의 국내 생산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코로나19 팬데믹은 제약/바이오 분야에서 해외 공급망 의존의 취약성을 드러냈습니다. 미국 바이오시큐어법(BIOSECURE Act)과 같은 정책적 움직임은 자국 내 핵심 기술 및 생산 역량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컴퓨팅, 우주, 핵심 광물 등 다양한 분야에서 딥테크 스타트업으로의 투자를 촉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현재의 딥테크 투자 활성화를 '버블'로 진단하면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1840년대 철도 버블이 영국에 철도망을 남기고, 닷컴 버블이 광대역 인터넷과 저렴한 클라우드 인프라를 구축했듯이, 지금의 딥테크 버블 역시 상당 부분의 자본은 증발하겠지만 핵심 산업에 필요한 인프라와 기술 역량을 남길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물론 과도한 수수료를 떼거나 허황된 미래로 자금을 모으는 악성 플레이어의 존재는 경계해야 하지만, 최고 인재들이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가 이루어지는 것은 인류 전체에 이로운 변화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