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첨단 인공지능(AI) 모델의 개발 속도를 늦추자는 미국 AI 업계의 제안에 대해 한국과 프랑스 고위 당국자들이 잇따라 반대 의견을 내놓으며 AI 기술 패권을 둘러싼 국제적 논쟁이 가열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선두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지적했고, 한국은 추격국으로서 속도를 늦출 수 없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습니다.
이번 논쟁은 앤트로픽(Anthropic) CEO 다리오 아모데이(Dario Amodei)가 '우리는 프런티어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We Must Pace the Frontier)'는 글을 발표하며 시작됐습니다. 그는 최첨단 AI 모델의 안전성 확보를 위해 개발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춰야 한다고 주장하며, 독립적인 안전 평가, 기업 간 안전 기준 마련 및 개발 속도 조율, 그리고 국가 간 협력을 통한 위험 관리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오픈AI(OpenAI) CEO 샘 올트먼(Sam Altman)과 xAI의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이에 동의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메타(Meta) CEO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는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등 미국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프랑스의 롤랑 르스퀴르(Roland Lescure) 재무장관은 AI 개발 속도 조절론이 현재 기술 경쟁의 선두에 있는 미국 기업들로부터 나온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이미 앞선 기업들이 후발 주자들의 속도를 함께 늦춰 현재의 우위를 유지하려는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프랑스와 유럽은 미국 기업들을 따라가기보다 자체 AI 역량을 강화하여 기술을 통제하고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의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AI에 필요한 것은 속도 조절이 아니라 속도 책임'이라는 글을 통해 한국은 AI의 속도를 늦출 여유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선도국이 속도를 조절하는 것과, 선두를 추격하며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야 하는 추격국이 스스로 속도를 낮추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범용인공지능(AGI)에 가까운 프런티어 AI 역량 확보 여부가 국가의 산업 경쟁력, 경제, 안보를 넘어 미래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배 부총리는 한국이 대규모 언어모델(LLM) 기반의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뿐 아니라 시각 언어 모델(VLM), 시각 언어 행동 모델(VLA) 등으로 기술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그의 주장이 무조건적인 가속론은 아닙니다. 그는 AI 개발 속도가 빨라질수록 안전과 신뢰를 준비하는 속도 역시 빨라져야 한다며, 연구 개발과 산업 활용에는 가속 페달을 밟되 위험에는 제대로 작동하는 브레이크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유럽연합(EU) 내에서도 입장이 갈렸다는 것입니다. 르스퀴르 장관이 프랑스의 AI 역량 강화를 강조한 같은 날,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Ursula von der Leyen) EU 집행위원장은 프런티어 AI 개발 속도 조절 논의에 지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는 AI의 위험 관리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공감하지만, 개발 속도 조절이라는 선택이 모든 국가에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는 복잡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프런티어 모델을 이미 확보하고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기업과 국가에는 속도 조절이 안전 확보를 위한 선택지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기술 격차를 좁혀야 하는 국가에는 같은 감속이 현재의 격차를 고착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AI의 속도를 누가 정하고 어떤 기업과 국가가 안전 기준을 만들 것인지를 두고 각국 정부 사이의 입장 차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입니다.
